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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은 논문 때문에 최근까지 무척이나 바쁜 나날을 보내었다. 논문을 쓰면서 매일 촛불 집회에 관련된 기사와 틈틈히 실시간 방송을 보았다. 순수한 마음으로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 공권력과 싸우고 희생당한 사람들을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예술의 역할을 고민하는 두눈 지금 현 시점에 난 무엇을 하고 있나?
시위에 참여한 국민의 저 실천에 두눈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인간으로 살아 있음을 다시금 느끼면서 나 자신이 너무나 작아지고 부끄러워진다.
비록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예술로써 그들에게 보답하리라 다짐해 본다.
인터넷을 만들어낸 서양 문명에 감사하며…"

학교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항상 경찰서 앞을 지나치게 된다. 가두 행진을 막고자 폭력을 행사한 경찰과는 엄연히 다른 대도 경찰이 밉게 느껴진다. 경찰서를 지나쳐 가다 별 신경 쓰지 않았던 현판이 두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문구가 “경찰이 새롭게 달라지셨습니다.” 가 아닌가?
참 어이가 없었다.


“경찰이 미쳤구나! 이제는 경찰 자신이 스스로를 높이는구나! 그래 달라진 거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달라지셔서 참 좋겠다.”

학교를 가기 위해 또 다시 경찰서 앞을 지나가면서 힐긋 현판을 다시 처다 보았다. 그런데 “셨”이 아니라 ‘겠’ 이 아닌가? “경찰이 새롭게 달라지겠습니다.” 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편견을 가지고 보니 ㄱ자가 ㅅ자로 보여 ‘셌’으로 읽고 나아가 ‘셨’으로 착각하여 인식한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여 대상을 바라보면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대부분의 갈등과 분쟁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갈등을 더 유리한 쪽으로 이 끌기 위해 본질을 꾸미려 한다. 하지만 솔직하지  못한 행동은 후에 상대방 뿐만 아니라 꾸민 사람에게도 삶의 고통으로 전이 될 수 있다.

 미국 쇠고기 협상이 시발점이 되어 많은 사람이 꾸며진 것에 대한 본질을 볼 수 있었고 지성인으로서의 행동을 하고 있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무엇이 더욱 중요한지를 자각하게 된 것이다. 삶에 있어서 결코 돈이 다가 아님을...
두눈이 표현하고 자 하는 작업 의도를 현 정권이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이지만 두눈의 작업보다 더욱 효과 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다 두눈이 하고자 하는 작업 개념을 수정해야 될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왜냐하면 많은 국민들이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게 하는 순수한 마음을 회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꾸며진 삶 속에 진실이 무엇인지를 현 정권은 체험을 통해 몸소 느끼게 해주고 있다.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이 냄비근성이다. 이 냄비 근성에 대한 성찰을 꼭 해야 한다. 부조리에 저항하는 행동이 반짝 일어나다 사라져 버린다면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 가는 것이다. 경찰이 새롭게 달라진 것 처럼...
냄비근성이 어떻게 생겨 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남자라면 대부분 다녀왔을 군대 생활에서 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군 생활 중 어떤 사고가 터지면 사단에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지침이 각 부대로 전달되고 그 지침대로 행동했었다. 그 지침은 군 생활을 더욱 힘들고 불편하게 하는 규칙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처음엔 그 규칙을 따르다가 차츰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럽게 원래 생활했던 방식대로 원상 복구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런 현상이 몸에 배이게 된 것이 냄비근성의 한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디 우리 민족성은 빨리 끓고 빨리 식는 냄비가 아니라 묵직한 가마솥 같은 존재이지 않을까?




            

찾으리_가마솥,디지털 액자,00:01:19_100x100x25cm_2005/예술공간HUT설치


  두눈은 사회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예술로써 홍익인간을 실천하고자 한다.
몇년동안 버려지는 손톱을 모아 작업 하면서 사회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회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회 혹은 타인을 탓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성찰해야한다. 그래야지 만이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많은 국민들은 그 근본적 원인을 자각했고 바꾸기 위해 몸소 실천하고 있는반면 문제를 야시킨 사람들은 무엇인 문제인지 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것이 참으로 안탑깝다. 문제의 근본 원인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묵은 때를 벗겨 낼 때 알몸이 되어야 하듯, 숨겨왔던 치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야 한다.
한가지 분명한것은 이제는 더이상 국민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것이다. 진정한 삶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이번 사태를 통해 몸소 깨달지 않았을까?



두눈_기준_손톱,랜즈_2x2x9.2cm _ 2005 / 2007년 11월 예술공간 HUT 설치

 

 “생사는 구름 같지만 생사의 무게는 구름 같지 않다.
구름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삶은 실체가 없으나
삶의 고통은 실체가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삶의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고통은 거기서 비롯된다.
사람들이 삶에서 원하는 것은 삶의 진실이 아니다.
위로다.
사람들은 삶의 진실과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진실은 끔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로의 방식으로 삶의 고통은 치유되지 않는다.
위로란 잠시 고통에 눈멀게 해주는 마약에 불과하다.”

강제윤   티베트 기행문


 

 그러하기에 우리는 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이겠지

                                                              두눈 생각



재미 이상의 그 무엇 fac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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