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눈프로젝트-손톱의운명?인연을만나다!

Things - 흑표범 세번째 개인전 본문

카테고리 없음

Things - 흑표범 세번째 개인전

실천예술가두눈 2009. 7. 9. 19:51

 

 

 

Things - 흑표범 세번째 개인전

2009. 7. 15 ~ 7 .22
 
반디 갤러리

 

오프닝 퍼포먼스 15일 오후 6시

 

  

 

 지독한 병에 걸린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숫자들로 가득 차있는 대형 패스트푸드점 안을 찬찬히 둘러본다. 나의 왼쪽 시야에 플라스틱 재질의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0과1이 들어온다. 그들은 한 손엔 일회용 콜라 컵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론 빠른 속도로 허공에 작은 원을 반복해서 그려대며 쉴 새 없이 떠들고 있다. 때마침 천정에서 노란색 조명이 격양된 그들의 얼굴 위로 떨어지자, 그들은 마치 무대 위의 배우들처럼 보인다. 본래 그들의 표정은 조명의 짙은 음영 속에 지워지고, 각자 맡은 대본 속의 역할에 몰입하여 절정을 향해가는 명배우들의 얼굴 같다. 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30, 45, 6996, 40532, 11, 100, 592347, 967, 5들이 줄지어선 계산대와 바가 보인다. 유니폼을 입은 29와 668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주문을 받고 커피를 만든다. 마이크를 댄 29의 입에서 ‘사랑합니다, 고객님’이 연신 울려 퍼진다. 

 그렇다고 해서 29가 고객들을 정말로 사랑하는 것은 아니란 것은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시공간 안에서 만큼은, 확성기를 타고 울려 나오는 거짓 사랑 고백이 어느 진실한 사랑고백보다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진다. 애초에 진실한 사랑이란 무엇이었던가. 기억해 보려고 해도 기억나지 않는다.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이제는 복제에서 거꾸로 원본을 유추하고, 진실 같은 거짓 속에서 거짓 같은 진실을 반추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 공간의 암묵적 약속이자, 이 세계의 조용한 규칙이다. 그런데 하루 평균 8시간의 근무시간 동안 29는 저 거짓 아닌 거짓 멘트를 평균 몇 번이나 읊는 것일까. 그가 한 시간 동안 10번을 읊는다고만 가정해도 하루 80번, 일주일엔 560번, 한 달에 이틀을 휴무로 쓴다고 치면 2080번, 일 년에는 24960번을 읊는 셈이다. 더 많은 패스트푸드와 더 많은 일회용 컵들과 더 많은 영수증들이 그녀의 거짓말들과 함께 끊임없이 생산되고 소비되고 다시 생산되어 지기를 반복한다. 이곳에서 정말로 사라지고 있는 유일한 것은, 진실한 사랑뿐 이다.

 

 

 

흑표범_ things, no 4_  photography _ 가변크기 _ 2008 

  

나의 병은 나 역시 숫자 중의 하나라는 것을 자각한 데서 시작되었고, 사실은 본래부터 숫자였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했기에 깊어져 갔다. 숫자의 숫자에 의한 숫자적인 삶에 익숙해진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매우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지구라는 거대한 시계 안에서 그 어떤 작은 부품의 역할도 해내지 못할 때 나는 어디로 가야한다는 말인가. 아니 그 보다, 대부분이 자신들이 번호라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나는 내가 언제부터 숫자가 되었는지를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고심 끝에 나는 불행히도 그 지점이 내가 태어난 순간이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장맑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더불어 ‘나’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기억해내기는 어렵지만,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나’라는 인식이 없었다고 확신한다. 그때의 우리들은 ‘나’, ‘너’, ‘우리’, ‘그들’ 등의 구분 없이 하나의 무의식 덩어리였다. ‘나’와 ‘너’라는 구분이 없기에 외롭지 않았고 완전히 충만했다. 존재를 자각하지 않는 존재함 이! 었고,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이었다. 칼 융에 따르면 의식을 가지기 전의 무의식적 상태인 자기(self)라고도 부를 수 있는 그것은 바로 인간의 본질이다. 그러나 육체를 가지고 지구라는 상대적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고, 삶의 과정 속에서 나의 의식적 자아, 에고(ego)가 스스로 경계를 그어가면서 어느새 번호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흑표범_ things, no 8 _  photography _ 가변크기 _ 2008

 

인간이 태어나는 지점에서 죽는 지점의 사이, 바로 그 시공간의 간격이 번호의 삶이다. 우리는 삶과 동시에 죽음 또한 선사받았다.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한정된 시공간은 죽음과 함께 소멸될 한정된 육체, 한정된 물질의 의미로 다가온다. 강박은 바로 그 한정성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연약한 육체가 시간의 흐름 속에 점차 노화되어가다가 언젠가는 결국 소멸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것에 집착하고 그것이 영원하기를 갈구한다. 이런 욕망은 육체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하지만 그런 욕망은 물질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한정적이고 소모적 일 수밖에 없다. 사격수는 과녁을 향해 자신의 욕망을 발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론 과녁의 욕구에 의해 사격수가 소비되어 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욕망의 대상과 주체가 뫼비우스의 띠같이 얽혀있는 체계 속에서 세계는 점점 물질화 되어 팽창한다. 이 시스템 속에서 물질은 가장 완벽한 가치와 이상으로 보이지만, 인간은 물질에 의해 소모되고 소외된다. 인간의 욕망은 결코 물질에 의해서 충족되지 않는다. 그래서 ! 육체와 정신의 괴리가 형성되고, 이 괴리감을 메꾸기 위해 인간은 물질에 집착하면서도 물질 이상의 가치를 갈망하게 된다. 우리는 삶을 질서 있게 컨트롤 하기위해 스스로를 숫자화 시키고, 역으로 삶을 극복하기 위해서 숫자로부터 벗어나야한다는 콤플렉스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육체와 물질과 가시적인 것에 가치를 두고 있는 한정된 시간의 삶인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영혼과 비물질적인 것, 비가시적인 것 그리고 영원성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다. 번호인 동시에 번호로 매겨질 수 없는, 의식의 주객체인 동시에 의식에 읽히지 않는 존재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갈망이다. 그러한 갈망은 태어나기 전의 우리(self)에게서 온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다.


 

흑표범_ things, no 6_  photography _ 가변크기 _ 2008

 

한 영화감독이 어느 영화제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태어난 것 자체가 비극이다. 하지만 햇살이 비추고, 바람이 불면 다시 살고 싶어진다.’ 햇살과 바람은 삶을 둘러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에너지, 본질의 메타포이다. 예술이 이미지 너머에 존재하는 비가시적인 것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자연은 바로 신의 예술이다. 이렇게 육체적 탄생 이전의 우리(self)가, 육체의 옷을 입은 우리(ego)의 인식에 순간적으로 투영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나는 이 부분에 나의 병이 치유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 결국 인간의 삶이란 것은 단지 숫자로서 시공간의 간격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삶을 초월한 정신작용에 그 본질이 있는 것이다._흑표범

 

 

반디 갤러리 _ 서울 종로구 사간동 36  (약도 월요일 휴무 )

http://www.gallerybandi.com/            02- 734 - 2312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