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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종이 인영작가 김영희의 작품도록 감상평: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인가"  
 

미술을 미술로서 직관하기 _ 유리알유희 


Kim Young Hee: very korean, very european, very universal_ Rupa Publishing



김영희_ Heimatsommer/ Homeland Summer _ C- Print _ 80cm x 100cm _ Edition of 5 _ 2008


이번에 출판된 닥종이작가 김영희의 작품도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시골풍경과 오동통한 뺨따구를 가진 꼬마애들이 자아내는 풍경과는 거리가 좀 있다. 일단 매체가 다르다. 이차원(적인)조각이라 도록에 써있는 것은 손으로 빚어낸듯한 인물들과 작가가 선택한 사물들이 풍경사진을 배경으로 찍혀졌기때문일것이다. 작품에서도 찍힌 사진과 사물들의 질감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작품에서 인물들은 별로 보이지 않고 혹 보여도 대부분이 우리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스스로가 상황에 집중하고있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몸짓은 그들이 작품에 재현된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보는이를 대신하고 있다는 중재적인 느낌과 역할을 맡고 있음을 알게해준다. 또한 보는이의 작품이입을 어느정도 차단하고 있는 역할도 떠안고 있다.



 
김영희 _ Happy Birthday _ C- Print _ 100cm x 150cm _ Edition of 5 _ 2008


내가 김영희작가의 작품도록을 보면서 하는 생각은 그리 특별하지않다. 서양에서 외국미술가로 살아남기위해서 동양작가들이 작품에 사용하는 문화적요소에 대해 스치는 생각들이 그것이다. 서양에 거주하는 동양작가들이나 세계미술시장에서 활동하는 동양작가들의 작품들은 눈에 뜨이기 쉽게 마련이다. 바로 그들이 이국적인 요소를 작품에 수용하기 때문이다. 일단 이런 요소들은 본토인인 서양인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동양의 많은 사람들이 유럽과 미국을 동경하며 그들의 생활양식을 흉내내는 것과 별로 다르지않다.
현대미술시장에서 대가로 인정받는데는 세가지 조건이 있다는 말이 있다. 하나는 백인일것,  가능하면 동성애자일것 (양성애자면 더 좋다.) 그리고 남성일것. 이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것이다.
사회 어느분야든 여성이 성공하기에는 불리하게 구조되어있다는 사실의 언급은 차치하고서라도 한국출신을 비롯하여 유럽과 미국을 제외한 나라에서 태어난 미술작가들은 이러한 조건이나 환경과는 거리가 있다. 그런 그들이 세계에서 인정받는 가능성은 내가 보았을때 두가지이다.하나는 자국의 문화를 주관람객이자 고객인 서양인의 입맛에 맞게 제대로 살려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제적인 이목을 끌어낸다면 후에 자국에서 발붙임하기에도 나쁘지 않다. 10여년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수많은 한국적토우를 설치하여 상을 받은 전수천을 떠올리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것이다. 단점은 생명이 짧다는 것이다. 일본과 독일에서 서양문화를 탄탄히 공부하고 자신만의 미학을 구축한 백남준과는달리 지금의 현대미술시장에서, 적어도 유럽에서 전수천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한국토우설치보다는 중국 진시황제의 무덤이 더 스케일이 크고 인상이 강하니 어쩔 수 없는일이다. 미술은 단순한 시각의 화려한 프레젠테이션이상의 의미를 가진것을 간과하기때문에 오는 현상이다. 매번 비엔날레 한국관앞에서 꽹과리와 장구를 쳐댈 수는 없는 일이며 어차피 보는 서양인들의 대부분은 이 음악과 춤이 어느나라 음악문화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대부분은 들어도 바로 잊어버린다. 스님들을 모시고 열띤 퍼포먼스를 하는것도 유모차와 아이를 앞세운 유럽가족들의 구경거리정도는 될지 모르나 더이상 미술관계자들의 관심을 끌 수 없다. 그런 일은 자국에서 하여 관광상품화시키는것이 더 합리적이며 현명하다. 매끈한 도자기나 투박한 항아리를 이용한 설치전시도 마찬가지다. 지금 유럽에서 이러한 작품 소재들은 결국에는 국적을 잃은채 중국미술인지 한국미술인지 일본미술인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서양인들의 집에 놓여지는 인테리어소품일뿐 미술작품으로는 눈길을 끌지못한다. 아니면 외국미술, 특히 동양미술을 전시함으로써 자신들이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미술관임을 알리려는 어리석은 일반미술관들의 희생양이 되기 일쑤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은 다소 무리가 있으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제적인 성공을 꿈꾸는 한국작가들의 미학의 범위를 제한시키는 문구일뿐이다.
자본과 철저히 연결된 미술분야에서 작가의 이름이 유명해지기위해서는 세계미술시장을 쥐고 있는 부호들의 눈에 드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이들의 손에 직접 작품을 팔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보통 이들은 문화를 옆에 끼고 성장하여 어느정도 작품을 보는 안목이 있는데다가 세계에서 내노라하는 현명하고 냉철한 사업가들이 대부분이라 작품을 사들이는 데도 자신의 취향만을 고집하는 어리석은 일은 절대 하지않는다. 현대미술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현대미술품 수집가 프랑스와 피노. 안도 타다오에게 의뢰하여  미술관으로 개조한 베니스의  팔라쪼 그라씨와 그곳에서 열렸던 전시회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Where are we going“에  소개되어진 작품은 전부 피노의 소장품이었는데 그 넓은 팔라쪼를 꽉 채우는 규모란  과히 인상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규모뿐만이 아닌 현대미술의 중요한 부분을 작가별로 콕콕 찝어 정리해놓은 듯한 그 전시는 피노가 미술가이외에도 친분을 쌓고 있는 미술사학자들과 큐레이터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을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어도 단번에 짐작할 수있을만큼 일목요연한것이었다. 이런 일은 비단 피노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다. 유럽의 이름난 사업가들과 정치인들은 대부분 문화에 많은 투자를 하며 개인미술고문관을 고용하고 있다. 그러니 유명해지려면 세계적으로 유능한 큐레이터나 미술사학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알리는 것이 무척 중요한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보통 동양미술사가 아닌 서양미술사를 정통으로 공부한 박사출신들이라 동양미술을 비롯한 이국문화에는 상대적으로 눈이 밝지 못하며 이국문화를 보더라도 자신들의 인문과학적지식과 눈으로 보고 해석한다. 그러니 우리들의 눈에는 별것도 아닌것(!)이 몇백만불에 팔려나가는 일이 종종 생기는 것이다.




타카시 무라카미 _ My Lonesome Cowboy _ 2001


한때 일본미술이 유행할즈음에서 동양미술이 서양인들의 눈을 뒤집어놓은 일이 있었다. 서양미술의 특징중 하나는 눈에 띄는 유동성이며 1900년대의 미술의 움직임은 그 유래가 없을만큼 활발하였다. 이시대를 전후로하여 서양미술의 획을 이룬 굵직한 작가들은 일본의 미술양식이 유럽아카데미식의 고루한 사진적사실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술로 전진하기 위한 일종의 제시라고 판단했으며 이 일본미술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그들의 미학으로 해석, 재현하여 일본주의라는 과도기적인 이즘을 거쳐 그들의 미술을 양적, 질적으로 발전시켰으며 현대의 서양미술사가들도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 수없이 재현되고 또 재현되는 부처처럼 요새 자주 보이는 이국의 미술과 서양미술을 보기좋게 섞어놓은 작품들의 대부분은 내외국작가를 막론하고 내포하고 있는 정체성이 불투명하고 미학도 어중간하여 외국에서든 자국에서든 그 생명이 짧거나 가늘다.  갯수를 따지면 잘 팔리고 있는듯 보일지모르나 굵직하게 팔리거나 이름이 알려지는 일은 드물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이런 작품들은 주로 해외아트페어에서 또다른 눈요기로 주목을 받다가 변호사나 의사에게 되팔게 될 대도시 잘잘한 상업화랑들의 주요 수입원이 된다.
이국의 미술가로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서양의 작가들과 동등한 미학을 같는 것인데 당연히 쉽지 않다. 전통과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 태생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학입시를 위주로 교육을 하는 한국과는 달리 유럽은 자국을 비롯하여 유럽여러나라의 문화와 외국어를 위주로 자국민을 교육한다. 자국문화를 수용하는데서부터 벌써 그 시작이 다른것이다. 그래서 유감스럽게도 한국에서는 동양미술도 서양미술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상태에서 모호한 작가기질과 뛰어난 손재주만 가지고 애매한 개인적인 감정을 주축에 두고 유명작가의 화풍을 따라하거나 서양의 미술을 받아들여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수박겉핥기식으로 흉내만 내거나 눈요기거리 그림만 그리다가 흐지부지 사라지거나 고상한 취미로 안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현상에서 도퇴되지않기위해 적지 않은 작가들, 특히 젊은 작가들이 특이한 작품재료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두기도한다는것에 우리는 분명히 주의해야한다.
분명 많은 작가들은 작품에 과장된 감정을 투여한다.  작품이 전쟁이나 어떤 극심한 사회변화를 배경으로 하여 많은 이의 공감을 살 수 있다면 재고될 수있다. 그러나 내가 보았을때,  작가로 이름을 떨치고 싶다면 작품의 감정표현은 정도를 넘으면 안된다. 미술은 결단코 현실과 동떨어진 향수어린 자기만의 세상이 아니고 이것을 관객에게 강요해서도 안된다. 이러한 요소는 미술의 중요한 소재가 될 수는 있으나 미술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세계적인 대가로 서기위해서는 미술이 내포한 요소 전부를 노려야한다. 작가로서 세계미술시장에 이름을 날리기위해서는 보는이가 그냥 지나칠 수 없을만큼 작품의 내면과 외면이 뚜렷해야하며 강해야 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연관관계가 확실하며,사회의 터부를 서슴지않고 건드릴 수 있을만큼 무모해야 유리하다. 미술은 문학, 음악과 더불어 한 시대의 현상을 반영하는 거울이며 범인들은 이해할 수없는 방식으로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그 매력을 잃지 않는다. 미술은 인문학의 언어가 표현하지못하는 부분을 충족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 부분은 다시 미술사가들에 의해 언어로 풀어진다. 이렇게 미술은 학문의 순환고리에 속하는것이다. 미술사에서 이름을 낸 작품들은 아름다운 외형을 잃지않으면서 그 시대를 가장 분명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대변하는 작품들이며 과거의 미술과 문학, 과학분야와의 강한 연대감, 현재에 대한 재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비젼을 준다는 점에서 큰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미술작품은 단순하지않으며 단순해서도 안된다. 미술작품은 단순히 ‚느끼고 음미하는’ 아름다운 누드나 보기좋은 풍경이 주는 외형에 한정지어진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하며 관객으로서든 미술사가로서든, 아니면 미술평론가로서든 어물쩍 작품과는 하등 상관없는 미사여구나 부차적인 것으로 작품의 본질을 감추는 일은 피해야하고 경계해야만한다. 그것이 한국미술의 모호함을 최대한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중 하나일 것이다.
미술과 인문학을 동떨어진 분야로 규정해놓고 예술성과 손재주를 혼돈하는 상태에서 부진한 미술교육을 강요받는 한국에서는 타작가의 작품의 내면적인 것에대한 영향보다는 외형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 경우가 당연한것이다.  작품의 배경이나 미학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작품에서 작가의 감정부터 찾아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애매모호함을 추구하여 작가좋고 관객좋고 분위기만 형성하려고 하는 우리와는 달리 그들 서양의 유능한 큐레이터와 미술사학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인문학적 지식을 토대로 바로 이러한 객관적인 부분들을 작품에서 찾고자하며 재능있고 비젼있는 작가들과 친분을 쌓는다. 미술작품없이는 미술사가 있을 수 없고 작가들에게 구체적인 영감과 방향을 주는 미술사없이는 진보적인 미술역시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희  




이소연


 

황호섭


서양이 과연 동양의 감성을 이해할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그 반대도 역시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서양과 동양의 터울은 좁을지모르나 깊다.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으시대고 싶어서 이국의 그림을 잘 사들인다. 그러나 사들이는 횟수만큼 그들은 이국문화를 이해하지못한다. 그것은 동양에서도 마찬가지라는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의 작가들에게 한국의 문화소개, 그곳에서는 이방인인 그들이 보고 해석하는 본토문화의 재소개와 낯선 유럽에서 적응과정을 소재로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선택이 아니며 본토인들에게도 매력이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내가 이번에 김영희의 이번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가 이때문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화려한 볼거리와 함께 그의 문화적기원인 한국과 한국에 대한 직시가 주를 이룬다.

오래전부터 독일에서 살고 있는 황인이며 자식이 있는 평범한 어머니이자 여성인 김영희작가는 우리에게 닥종이작가로 친숙하며 넓적하고 순진한 한국인의 얼굴을 친근감있게 소개하고 우리네 시골풍경을 유아적으로 재현하여 한국과 유럽에서 여러번의 전시를 한 작가이다. 유럽에서는 비싸게 팔리기때문에 매력적인 주재료인 한지와 닥지는 이국적인 재료인데다가 귀엽게 빚어진 인형들이 한결같이 보여주는 넓고 동그란 얼굴과 쭉 찢어진 눈, 납작한 코, 작은 입, 통통한 몸과 짤막한 키는 서양인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본래의 얼굴을 가만히 두지않는 현실과는 달리 미술에서만큼은 전통적인 한국인상을 찾고자하는 한국인의 입맛에도 맞아 떨어진다.




김영희



김영희 _ calla anc _ 70cm x 70cm x 132cm _ 2004




김영희 _ Yellow Buddha and Pineapple _ 70cm x 70cm x 65cm _ 1995


  이러한 두마리 토끼를 지닌 조형세계를 가진 작가가 작품의 매체와 주제를 바꾸어오고있다. 왜일까. 답은 이미 위에 언급되었다. 닥종이인형이후 그의 고향과, 부처 (작가는 경주출생이다)를 여성의 시각으로 일관성있게 작업해오던 김영희의 작품은 그간 자신이 품었던 모든 개인적 사회적 고민을 일시에 털어놓기라도 하듯 과거의 조형세계에서 벗어나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본인의 정체성과 사회성에 대한 고민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패턴의 변화가 낯설정도로 크다.
김영희의 선택은 현명할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작가의 미학과 활동은 그 질을 떠나서 항상 동적이어야한다고 나는 생각하기때문이다. 작가의 입장에서 작풍을 바꾸는것은 쉬운일이 아니며 실제 미술사에서도 매우 드물게 보여진다. 이러한 일은 미술의 단순화를 초래한다. 헨리무어와 모자상, 살바도르 달리와 흘러내리는 사물들과 같이 작가는 남다른 아이디어로 자신을 상품화하고 안주하고자하며 이미 그 진행을 멈춰버린 미학으로 끊임없이 안료와 나무를 소비한다. 자신을 서슴지 않고 미술작품공장으로 만들어버린 앤디워홀. 그래서 그는 마르셀 뒤샹못지않은 아이러니미학의 대가인것이다.


 

김영희 _ Renovierung/Renovation _ C- Print _ 40cm x 60cm _ Edition of 5 _ 2008




김영희 _ Dankbarkeit/ Gratitude _ C- Print _ 180cm x 260cm _ Edition of 5 _ 2008


김영희의 이번 작품들을 보면 먼저 지난 작품들과는 달리 인물의 정체성이 불분명하다. 게다가 작가의 자화상으로 이해될 수도 있는 이 인물들은 대부분이 관람객에게 등을 돌리고 배경을  바라보고 있도록 놓여진후 사진찍혀졌다. 작품의 대부분은 사진을 배경으로 하여 작가가 직접 만들거나 골라낸 오브제를 찍어낸 사진이다. 사진안의 사진. 한동안 미술사학자들을 괴롭혔던 주제 그림안의 그림과도 맞물린다. 작품의 표현된 인물은 사진과 관람객사이의 중간에 서서 중개인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시선을 자신으로 끌어당김으로써 관람객이 직접 작품에 도입되는 것을 막고 관객이 작품안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인물의 존재감과 이유를 묻도록 유도하고 있다.


 


김영희 _ 7000Won _ C- Print _ 160cm x 240cm _ Edition of 5 _ 2008




김영희 _ 멸치_ C- Print _ 160cm x 300cm _ Edition of 5 _ 2008


 

김영희 _ color _ C- Print on Diasec _ 2008


김영희가 보여주는 풍경을 본다. 서양인에게는 이색적인 한국의 여러 진풍경들, 새로 절을 단장하는 모습이나 부처앞에서 엉덩이를 높이 세우고 미숙하게 절을 올리고 있는 꼬마아이. 절간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미색의 연등제, 장거리 풍경, 번쩍이는 간판으로 넘쳐나는 대도시의 밤풍경등 우리에게는 정겹고 익숙하며, 그들에게는 신기한 볼거리가 넘친다. 멸치로 재현된 생선이 보이는 작품은 익살스럽다못해 아이러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외에도 향수와 고독이 작품에 얼룩진 작가의 유럽에서의 경험도 간간히 보인다. 이로서 작가는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작가가 가진 모든것을 보여줄 준비가 되어있음을 알린다.
작가는 이외에 동양에서 온 작가로서 외국인인 자신의 눈으로 보는 독일문화를 재조명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같은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쭉 찢어진 외꺼풀의 눈을 가지고 독일문화를 대변하는 서양의 옷들과 풍경을 배경으로 한 자화상이 보여주는 김소연의 그림처럼 김영희는 부활절달걀을 소재로 잡았다. 알록달록 칠해진후 집안 이곳 저곳에 감추어져 자신을 찾아줄 아이들의 손을 기다리는 유럽의 전형적인 아기자기한 부활절달걀들이 이 한국출신의 작가의 작품에서는 깨어져 색을 토하고 있다. 야외에서 고기와 소시지를 굽기를 좋아하는 바이에른 사람들의 그릴과 바이에른을 상징하는 하늘색무늬의 식탁보가 깔린 식탁도 동양에서 온 노란작가에게는 새로운 문화의 일부분이었을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요소들도 놓치지 않고 소꿉장난의 한 장면처럼 재시하면서 한국의 아기자기하고 정겨운 풍경을 보여주던 우리가 기억하는 작가의 손맛을 떠올리게 한다.




김영희 _ Dicker Drache/Fett Dragon _ C- Print _ 160cm x 200cm _ Edition of 5 _ 2008


 김영희의 작품은 많은 물음표를 내게 남긴다. 그의 작품도록표지가 말하는 것처럼 나는 그리 간단하게 한국적인것이 유럽적이며 세계적인것이라고 동의할 수는 없다. 이 문구는 오히려 내게 이제껏 미술작품에 물릴만큼 써먹힌 동양의 문화요소, 한국의 문화요소를 통해 얄팍하고 쉽게 이름을 날리려했던 본인을 비롯한 다른 동료작가들을 반영하고, 동양미술의 이러한 분위기를 한계짓고 조성하는 유럽미술계를 회고, 비판하는 것처럼 인지된다. 도록에 보이는 진지하기도 또는 어정쩡해보이기도 하는 인물들의 행동도 그렇다. 그 어느누구보다 인물표현, 특히 표정연출에 능하고 손맛이 탁월한 작가김영희가 이런 인물들을 작품에 재현했을때는 분명 이유가 있을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장난감용이 분명해보이는 용을 확대하여 찍은 사진앞에 올려진채 용에 화들짝 놀란듯 팔을 올리고 있는 인물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작품의 제목은 ‚살찐 용’이다. 인물은 정말 용이 뚱뚱해서 놀란걸까? 우리를 대변하는 듯한 까만 머리에 짧은 팔다리를 가진 그 인물이 친숙한 상상의 생물인 용을 보고, 그것도 사진을 보고 놀랄 이유는 없다. 더구나 용이 살이 쪄서? 입을 쩍 벌리고 이빨과 혀를 내보이는 용을 서양인관객이 보기전에 이 동양인 인물이 미리 놀래준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저 인물은 독일에 사는 나에게 ‚오마나, 세례를 안 받았어?’라며 놀라는 보수적인 독일인들, 바이에른사람들처럼 용에 대해서 잘 모르는 서양인관객들 앞에서 익살맞은 제스처를 부려보는 것일까? 만약 이 인형이 김영희본인이라면 작품해석이 달라질것인가? 삶의 뿌리를 한국에 두고 있지만 인생의 반을 독일에서 보낸 작가가 인지하는 독일을 비롯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하는 한국문화의 키치를 말하고자하는 것일까?  그럼 살찐 용이라는 제목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걸까. 이것은 어쩌면 사진과 조각의 차이가 주는 매체의 문제인걸까?




김영희 _ 겨울의 시장 _ C- Print on Diasec  _ 2008


보이지 않는 얼굴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인물의 육체와 행동으로 향하며 관람객은 그것을 사진의 배경과 작품의 제목과 연관시키려한다. 문득 인물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이러한 질문은 동시에 관람객의 상상의 자유에 따라 인형이 짓고 있을 표정의 폭을 넓힌다. 문득 빗질한지 한참된것처럼 보이는 인형의 심하게 헝클어진 검은 머리가 작품에 적지 않게 보임이 눈에 띈다. 작품에 비교적 곱게 나오는 금발과는 달리 흑발들은 하나같이 시커멓고 빗질이 불가능할 정도로 헝클어져있다. 이유가 뭘까. 한달이라도 스트레이트를 하지 않으면 동양인의 유전자를 그대로 내보이는 곱슬머리나 어중간하게 한 한국아줌마식 동네파마를 재현한것일까.




김영희 _ Lucky Cat _ C- Print _ 80cm x 100cm _ Edition of 5 _ 2008


김영희는 한국작가인데 왠 일본고양이. lucky cat 이라는 저 고양이뒤에 있는 사진에 보이는 하나은행이라는 글자. 이쯤되면 스시를 먹고 카나몇글자 안다고 일본어를 구사한다 으시대는 서양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 없다. 그들이 과연 저 사진에 보이는 다보탑을 알아볼 것인가. 게다가 작가는 다보탑을 그냥 두지 않고 아주 촌스럽게 색을 칠해버렸다. 서양인의 눈에는 모두 그게 그거같아보이는 동양의 문화. 치파오와 한복, 키모노가 구분이 안되는 그들. 한국보다 먼저 유럽에 알려진 중국과 일본. 대학에서도 일본학과 중국학처럼 독립된 분과를 갖지 못하고 일본학이나 중국학과에 속해져 전세살이를 면치못하는 또다른 아시아학과가 바로 한국학이다. 그외에도 김영희 작품들의 색감이 눈에 띈다. 서양인의 눈에 이 색들은 분명히 동양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색이 주는 색감을 다르게 알고 있다. 나는 작가가 일부러 우아한 동양적 색감을 싸구려로, 키치로 변질했다는 생각을 한다. 김영희의 새 작품들에서 과거의 조형세계가 보여준 익살과  현재의 차이를 인지하는 작가의 아이러니가 동시에 느껴진다. 그가 보이는 작품의 변화는 지금 유럽에서 활동하며 본인의 정체성과 문화를 소재로 작업하는 작가들의 현주소와 한계를 알려주는듯하기때문에 내게는 의미가 있다._ 황미영(뭔헨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과정)


  ps: 블로그를 통해 알게된 유리알유희님은 실기를 전공하신 분이라 그런지 작품을 위한 비평글을 쓰는 것 같습니다. 철학사상을 따와 비평하기 보다는 미술을 미술로서 직관하여 글쓰기를 하신다고 하네요. 그리 난해하지도 않은 미술비평의 대안적 느낌을 받은 글이라 많은 분들에게 소개하고싶어 이렇게 글을 게시하게 되었습니다.



유리알유희의 블로그 _ 
http://blog.daum.net/glasperlensp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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