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아 _ 웅크린 아이 _ 5mm스텐봉, 체인 _ 80 x 80 x 100cm _ 2007
“공간과 공간을 잇는 또는 형상을 이루기 위한 실들의 반복과 집합은 우리의 관계를 의미하며 그로인해 보여지고 생성되는 형상 또는 이미지는 인간, 사물의 존재이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인식을 독립된 그 자체가 아닌 그것이 놓여진 관계 안에서 해석하고 인식하며 인간의 자유롭고자하는 고고한 의지 또한 이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그렇게 보여지고 생각되어지고 만들어지는 존재이다.”_ 김윤아의 작업노트에서
김윤아 _ Metamorphose _ 아크릴,체인 _ 37 x 37 x 50 _ 2008
제어된 욕망의 변증법 인간은 실타래처럼 얽인 관계들로 구성된 사회라는 시스템 속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나라는 사람은 수많은 관계들 간에 형성되어진 존재, 자아보다는 타인의 시선에 포착되고 규정되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도 인간은 소외와 격리를 경험하는 모순된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만은 않는다. 자신을 주체화하고자 하는 의지는 이러한 관계들 안에서 더욱 힘을 발하며 이를 통하여 추동력을 획득한다. 조각가 김윤아가 주목하는 것은 이 점이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고, 아름답게 보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속성일 것이다. 따라서 무한한 욕망주체인 인간은 인정받기 위하여 부단히 자신을 연마하고 좌절은 딛고 일어서며 과오를 반성하고 더 잘 하고자 노력한다. 이렇듯 관계 안에서 형성되어진 존재간의 얽힘, 그 얽힘 속에서 자신을 비동일화 하고자하는 의지, 이의 성취에 담보되는 노력, 이 모든 것들은 실존적 인간이 맞닥트려야 할 숙명적 여건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한다. 김윤아는 인간의 가능성을 이러한 여건과 관계성에서 찾는다.
김윤아 _ What are you becoming _ 낚시줄, 아크릴, 조명 _ 72 x 62 x 162 _ 2007
김윤아가 그 관계성의 지표로 선택한 조각재료는 실이다. 통상적인 조각의 형태에서 공감을 얻지 못한 젊은 조각가는 실이라는 재료의 가능성과 의미에 주목한 것이다. 흔히 우리가 “의식주”라고 칭하듯이 실은 우리 인간의 삶에서 밥과 집보다도 우선되는 중요한 물품이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베틀과 생로병사를 함께했다. 고금의 신화를 보더라도 실은 여성성의 상징이자 인내와 노동, 그리고 욕망의 지표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아라크네의 비극을 통하여 예술적 욕망과 좌절을,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통하여 한줄기 빛(a thread of light)을 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페넬로페’만 하더라도 끊임없이 실을 잣고 푸는 과정에서 욕망을 거부하는 창조성을 들어낸다. 끝이 안 보이는 지난한 노동,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 과정의 현상학, 필자는 김윤아의 작품에서 이 점을 목도한다.
김윤아 _ What are you becoming _ 낚시줄, 아크릴, 조명 _ 72 x 62 x 162(부분) _ 2007
페넬로페의 옷감 짜기 그의 작품 <나비>는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는 사랑의 전령사가 아니라 마치 이카루스처럼 허공을 맴돌다 어떤 가공할 폭력에 의해 추락을 강요당한 상처받은 영혼처럼 보인다. 날개와 몸체는 생기를 잃었고 나비의 발은 땅에 고착되어 다시는 땅을 박차고 날아오를 수 없을 것 같은 모습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각가의 진한 노동의 흔적과 좌절된 욕망을 추체험 하게 된다. 동시에 우리는 그의 조각에서 실이라는 재료의 가능성과 한계를 본다. 그 가느다란 실은 프레임을 교차하며 얽히고설켜 예기치 않은 미감을 발산하지만 “조각적”이라는 고착된 시선에서 본다면 성과는 미미해 보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주객의 구분이 미분화된 상태에서 궁극적인 실재를 발견하고자 하는 욕구로 인하여 작가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예술의 지나친 관념화, 그로 인한 예술의 현실분리와 신비주의에의 매몰과 같은 부정적 요인이 드러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김윤아 _ 나비 _ 2mm스텐봉, 합성사 _ 90 x 160 x 120 _ 2008
“한 올 한 올, 내가 보여지기엔 실들은 너무 가느다랗다. 속은 허하고 팔은 무겁고 난 허공만 보는구나...” 그의 “혼자..시리즈” 중 <자화상>에 대한 작가의 푸념 섞인 독백이다. 이 섬세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형상은 예쁘게 만들고자하는 작가의 의식작용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작가의 미감은 천성적으로 미의 보편적 범주와는 거리가 멀다. 이번에 전시되는 일련의 작품들은 사실 통상적인 “예쁜 조각”과는 차별성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작가는 여성성의 숨결을 가진 작가적 의식으로 그로테스크를 신비로움으로 전이시키는 새로운 미적 가치를 창안해 냈다. 작가의 시각은 진부함을 적대하고 있어야만 한다. 여기에서 다시 필자는 그의 작업과정을 ‘페넬로페의 옷감 짜기’라는 여성적 작업과정의 아우라를 상기한다. 남편을 기다리는 페넬로페는 옷감을 짜고 풀고를 반복했다. 보편적 가치와 타협을 거부하기 위한 방법적 수단으로서의 지난한 노동, 다시 말하면 타성을 거부한 노동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여성적 순결성과 작가적 자존심을 발견하게 된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일정 부분 여성적 미감으로 점유된 경향, 즉 지극히 세밀하고 형식 논리적이나 그 수법에 있어서는 대단한 완벽성, 정교성을 보이는 작업 성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나는 이 작품 안에서 끝없는 재창조를 발견할 수 있다.
김윤아 _ 혼자.. 시리즈 - 자화상 _ 3mm철봉, 면사 _ 160 x 190 x 210 _ 2005
관계성의 총체 작가는 대상과 나란한 높이와 그 안의 세계를 세심하게 바라 볼 수 있는 영롱한 눈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 눈빛이 성실한 통찰력에 기반 할 때 비로소 작가의 역할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윤아는 대상과 물질을 타자화 하지 않고 자신에 육화시키는 진정성으로 예기치 않은 조각적 가능성을 이루어 냈다. 그가 선택한 실이라는 재료는 미묘한 빛을 발하며 형태를 이루고 관객과 조우하면서 조각의 영역을 3차원적 공간에 머물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What are you becoming?>라는 작품을 보자. 이 등신대의 조각은 아크릴판을 지지대로 낚싯줄을 얽어 만든 형상이다. 형태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작가는 광선을 이용하여 대상에 신비감을 부가한다. 빛을 머금은 대상은 경직된 자세에도 불구하고 마치 유기체처럼 변신한다. 그리고 작가는 뭇는다. 너는 누구냐고…. 존재하면서 존재를 묻는 역설,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를 무(無)라고 하지 않았던가?
The Hole _ 3mm철봉, 면사, MDF _ 130 x 50 x 250 _ 2006
사유, 탐구, 관찰 등 이성의 무기들은 존재가 있어야 만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는 인식론의 영역에서 구사되는 것이지 존재의 존재방식을 묻는 존재론 입장에서는 효용성이 없다. 그러나 인식은 스스로 완전무결한 실체 같은 것이 아니라, 결핍되어 있어 항상 어떤 외부대상과 관계하는 한에서만 규정되는 미완성의 것이다. 미완성이 완성되려면 무언가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결국 김윤아의 인식이 외부대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 바로 그의 작품이 된다. 이제 작가의 인식과 외부대상은 서로 분리되어 일방적으로 다른 한쪽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으로 한데 묶여 총체적인 관계성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실이라는 재료에 대한 가능성의 탐구와 욕망과 좌절의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 그의 실험적 형태들은 그 자체로서 완결된 것이라기보다는 탄생과 소멸이라는 자연계의 질서 어느 지점에서 하늘거리는 부나비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_이경모(미술평론가)
나비 작업 과정
나비 작업 과정
덕원갤러리 _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15 (약도 / 무료관람) 관람시간 10:00 ~ 18:00